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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전통에서 공간으로: 조각보의 현대적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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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전시 공간을 거닐다 보면 낯익은 듯 낯선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반투명한 천을 이용하여 공간의 경계를 부드럽게 나누고, 겹겹이 드리워진 패턴이 벽을 대신하며 관람자의 시선과 동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때로는 입구 파사드를 장식하거나 빛과 어우러지며 공간 전체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 중심에는 바로 ‘조각보’가 있다.

과거에는 물건을 싸거나 덮는 데 사용되었던 조각보가, 오늘날에는 전시 디자인의 구성 요소로 등장하여 새롭게 쓰이고 있다.

조각보는 여러 자투리 천을 이어 만든 보자기의 한 종류로, 한국 전통 공예의 대표적인 형태 중 하나이다. 조선 후기, 유교적 절제의 미덕과 실용 정신 속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생활 공예였다. 옷을 짓고 남은 천을 버리지 않고 모아 이어 붙여 새로운 쓰임을 만드는 행위는 단순히 절약 정신을 넘어서서 새로운 의미의 재발견이라고 볼 수 있다. 조각보는 자투리 천을 바느질로 직접 구성하고 조합하여 만들다 보니, 개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이 드러난다. 천 조각의 배열, 색채 구성, 바느질 기법 등을 통해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조각보의 독창적인 구성 방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정형화된 규칙없이 자유롭게 배열된 천 조각들이 전체적으로는 균형감과 조화를 이룬다. 각기 다른 색상들이 겹치면서 만들어내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현대 추상미술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V&A Museum)에서는 조각보를 ‘hand-stitched geometric abstraction’ 으로 소개하며, 20세기 서구 추상화와 유사한 미감을 지녔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조각보를 만들기에 앞서,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자투리 천을 구성하고 조합하는 과정 | 출처: 최덕주 작가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jogakbo_choi_dukjoo/

 

 

이러한 조각보가 최근 여러 전시 공간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박물관과 미술관, 공공 전시장에서 조각보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공간을 나누는 파티션, 시선과 동선의 흐름을 조절하는 장치, 그리고 전시장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시각적인 요소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얇고 반투명한 소재 특유의 유연성은 공간을 폐쇄하지 않으면서도 가벼운 경계를 만들고, 색색의 다채로운 패턴은 한국의 전통적인 미감을 더하면서도 시각적인 균형감을 형성한다.
이는 단순히 장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전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의 언어로 현대 공간을 다시 읽고 ‘재구성’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조각보가 가진 상징성과 기능은 전시 내용의 맥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관람자에게 편안한 감각을 제공한다. 이는 곧, 전통의 재해석을 통해 공간과 관람자 사이의 감성적 연결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최근 필자가 다녀 온 세 군데의 전시에서도 공통적으로 ‘조각보’를 활용하여 작가의 작품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거나 공간의 흐름을 유도하고, 작품의 컨셉을 전달하는 등의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었다.
 
1. 조각보의 공간적 활용: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시각적 장치
 
랄프 로렌(Ralph Lauren)은 기하학적 추상 섬유 예술가 원주서 작가의 작품을 매장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시각적 경험을 제시한다. 비단, 면, 그리고 모시와 같은 한국 천연 섬유를 활용하여 기하학적 추상 섬유 예술 작업을 하는 작가는 유물 조각보 패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순수 기하학적 형태와 생동감 넘치는 색채 조합을 통해 전통과 현대를 조화롭게 아우른다.
 

랄프 로렌(Ralph Lauren) 사운드한남점 ©류인혜
 
색색의 조각보는 공간에 활기를 더하고,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의상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간에 생기를 더하여 풍성한 인상을 준다. 특히 단색 의상이 나열된 배경에 색색의 화려한 조각보를 배치해 의상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준다. 또한 아트리움(Atrium) 상부의 천창으로 들어오는 자연광과 어우러지며, 수직으로 길게 설치된 조각보는 조형성과 공간 구조를 동시에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트리움(Atrium) 천창과 건물의 수직적 구조를 최대한 활용하여 조각보의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류인혜
 
2. 조각보의 공간적 활용: 시선과 동선의 흐름을 조절하는 장치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크리스챤 디올: 디자이너 오브 드림스 (Christian Dior: Designer of Dreams)》전시에서도 한국 전통 패치워크 기법인 조각보가 작품을 돋보일 수 있는 배경의 역할을 하면서 한국적 미감을 드러내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 공간은 조각보의 바느질을 연상시키는 유기적인 곡선 구조로 설계되었고, 이를 통해 75년에 걸친 디올의 디자이너 유산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 유기적인 곡선을 활용하여 이브 생 로랑, 마크 보앙, 지안프랑코 페레, 존 갈리아노, 그리고 현재까지 활동 중인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이어온 75년 유산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디올의 유산(Dior Legacy)’ 섹션에서는 조각보의 흐름에 따라 관람자의 동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디자이너 간의 관계성과 영향력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전통 공예가 단지 장식 요소를 넘어, 전시의 내러티브를 강화하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전통 조각보가 공간을 자연스럽게 분리하거나 이어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역대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아카이브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좌) 유기적인 곡선으로 공간을 이어주면서 조각보가 길을 안내해주듯 이어지는 전시 관람 형태 ©류인혜
우) 아티스트 레이디 차가 전시를 위해 새롭게 선보이는 크리스챤 디올의 초상 작품|출처: https://design.co.kr/article/120611
 
3. 조각보의 공간적 활용: 작품 개념과 외연의 폭을 확장시키는 장치
 
올해 3월에 막을 내린 미나 페르호넨 전시에서는, 창립자 미나가와 아키라가 다양한 협력자들과 함께 만든 직물과 텍스타일 작품들을 통해 조각보의 현대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가득한 수많은 작품들이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 중에서도 전시 말미에 자리잡고 있던 한국 공예 작가들과 협업한 가구와 조각보가 눈길을 끌었다.
 

따스한 색감의 노란 벽으로 가득 찬 공간에는 창립자 미나가와 아키라가 한국 공예 작가들과 협업한 의자, 가구, 조각보 등의 작품을 선보인다. ⓒHyeonki Yoon
 
사진 우측의 조각보 두 점은 최덕주 작가가 오랫동안 소장해 온 쪽염색 한산 모시에 미나 페르호넨의 대표적인 탬버린 자수 패턴을 더하여 한산 모시의 투명한 질감과 입체적인 자수가 조화를 이루며 두 소재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이처럼 수작업으로 정성스럽게 완성된 작품은, 두 예술가의 협업 과정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하며 관람자에게 편안한 감각을 전달한다.
이 전시에서는 최덕주를 비롯한 네 명의 예술가와의 협업을 통해, 각기 다른 시각과 감성이 교차하며 작품의 개념과 외연이 확장되었다. 이는 예술이 개인의 창작을 넘어서, 관계 속에서 더욱 풍성하게 진화해간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나 페르호넨 전시에 최덕주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출품된 조각보 작품 두 점|최덕주 작가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jogakbo_choi_dukjoo/
 
 
전통 공예인 조각보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닌, 오늘의 공간 속에서 새롭게 숨 쉬는 창조적 언어다.
전통의 본질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도, 시대의 언어로 계속해서 번역되고, 해석되고, 변주되고 있다. 전시 공간을 유연하게 구성하고, 시각과 감각을 일깨우며, 전통과 현재를 매끄럽게 연결하는 그 섬세한 천 조각들은, 여전히 그리고 새롭게 우리 곁에 존재한다.
 
 

출처 : 전통에서 공간으로: 조각보의 현대적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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