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해였다. 연초에는 일본의 쇼와 천황이 서거를 했고 6월에는 중국에서 천안문 항쟁이 일어났으며, 연말에는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등 세계를 뒤흔드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러한 격동 속에서 일본 후쿠오카에 등장한 <호텔 일 팔라초 (HOTEL IL PALAZZO)>. 이 작은 호텔로 인해 건축 그리고 디자인 업계가 들썩거렸다. 이탈리아의 거장 알도로시(Aldo Rossi|1931-1997)가 건축을 담당하고, 우치다 시게루(内田繁|1943-2016)가 아트디렉션과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으며, 다나카 잇코(田中一光 | 1930-2002)가 그래픽을 맡는 등 화려한 멤버들이 대거 참여한 일본의 첫 디자인호텔이 오픈 한 것이다. 당시 이토록 많은 유명 디자이너가 하나의 건축에 참여한 것은 일본에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건물은 일본의 사찰 등에서 힌트를 얻어 서양과 동양의 융합을 목표로 디자인되었다. 또한 외벽과 기둥에 이란산 트라버틴 대리석, 구리라는 전통 건축 자재를 사용함으로써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존재해 온 것처럼 시대를 초월한 타임리스 함을 추구했다. 이란산 대리석을 선택한 것은 건축가에게 이란이 동양과 서양의 교차로에 해당한다는 생각에서였다.
PHOTOGRAPH BY NACÁSA & PARTNERS
일본 주가가 최고치를 기록하며 호황을 누리던 버블 시대.
호텔 일 팔라초는 단순한 숙박시설이 아니었다. 호텔외관은 시선을 끄는 대칭적인 파사드 형태로 설계되었고 붉은 트라버틴 대리석으로 뒤덥힌 건물은 존재감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다. 내부에는 알도 로시, 쿠라마타 시로, 에트레 소토사스, 가에타노 페세라는 당대 최고의 멤버들이 디자인한 바가 네 군데나 병설되어 있었으며 모두가 극장처럼 드라마틱했다. 디자인으로 사람들을 매혹하고 디자인에 취해버릴 것만 같은 꿈같은 공간이었다.
호텔이 완성되자마자 후쿠오카시 도시경관상을 수상하고, 1991년에는 미국 건축가협회 AIA의 명예상을 수상했다. 미국 이외의 건축물이 수상한 첫 사례였다. 이를 통해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을 받았으며 그런 가운데,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로서 호텔 일 팔라조는 후쿠오카를 넘어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인 호텔로서의 지위를 확립해왔다.
(좌)에토레 소토사스가 디자인 한 바 , (중)알도 로시가 디자인 한 바, (우)가에타노 페세가 디자인 한 바
PHOTOGRAPH BY NACÁSA & PARTNERS
그러나 30여 년이 지나면서 곳곳이 노후화되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니즈도 크게 변화함에 따라 호텔은 2022년 1월에 휴관, 공사비 18억 엔을 투입하여 대규모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리노베이션이라고 해도 건물 자체가 20세기 후반의 흐름을 상징하는 귀중한 디자인 유산인 만큼, 단숨에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생전 우치다 시게루는 빠르게 소비되어 사라져 버리는 디자인에 대한 거부감을 비쳐왔다. 디자인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하며 디자인과 공간을 아카이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늘 이야기해 왔다. 호텔 일 팔라조는 당대에 많은 디자이너들의 재능이 모여 탄생한 독보적인 공간을 다시금 아카이빙한 미술관 같은 존재로 거듭나야만 했다. 그래서 이번 리뉴얼 디자인은 우치다 시게루의 뜻을 정통으로 계승한 우치다 디자인 연구소가 맡아 그의 철학을 세심하게 읽어내면서 공간을 재구성해 나갔다.
지하 공간을 개조해 탄생한 대형 라운지 'EL DORADO(엘 도라도)' 이미지
PHOTOGRAPH BY SATOSHI ASAKAWA
과거 해외 아티스트의 라이브 공연이 열리던 지하 디스코 공간에는 리셉션과 레스토랑 라운지가 신설됐다. 전면 벽에 우뚝 솟은 황금빛 선반은 옛 시설에서 알도 로시가 디자인한 바 'EL DORADO(엘 도라도)'의 선반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그 앞에는 우치다 시게루의 대표 작품인 '춤추는 물'이 놓여 있다. 시대를 뛰어넘어 로시와 우치다가 다시 한 번 아름다운 호흡을 맞추는 듯하다.
PHOTOGRAPH BY Yoshikazu Shiraki
2~8층 객실 층은 리셉션 옆의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각 층의 공용부도 볼거리가 가득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의 거울에는 로시가 그린 <호텔 일 팔라초>의 공간 구상 스케치가 그려져 있다. 모든 층을 돌아보면 전체 이미지가 연결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빨간색과 흰색의 스트라이프 패턴 카펫과 격자 모양의 빛을 발산하는 브래킷 조명은 기존에 있던 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객실은 총 77실. 직선적인 형태와 둥근 모서리가 특징인 의자와 소파, 테이블은 개업 당시 설치된 가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해 새롭게 디자인했다. 또한 객실 전체는 한가지 톤의 차분한 색감으로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침대는 슬럼버랜드사의 더블 쿠션 침대를 사용해 고급스러우면서도 편안한 공간을 완성했다. 뿐만 아니라, 거실 내부에 설치된 문을 닫으면 공용 공간의 소음이 잘 전달되지 않아 숙박객의 프라이버시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20세기 후반의 강렬한 디자인에 현대적 감각을 더한 '디자인 뮤지엄' 속에서 천천히 휴식을 취하는 그런 기분으로 숙박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HOTEL IL PALAZZO (호텔 일 팔라조) 시설 개요
・소재지: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추오구 하루요시 3-13-1
・객실 수: 77실
・부대시설: 레스토랑 & 바
・디렉션-리뉴얼 디자인: 우치다 디자인 연구소
・운영: 원파이브 호텔즈
・호텔 공식 웹사이트:https://ilpalazzo.jp
관련 사이트
https://casabrutus.com/categories/travel/377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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