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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산맥처럼 당당한 기억5·18 광주역사기행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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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4주년입니다. 사단법인 '좋은벗들'에서는 해마다 <5·18 광주 역사 기행>을 기획해 왔습니다. 이번에는 광주 전라지부에서 처음으로 본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구묘역(망월 묘지공원), 신묘역(5·18 민주묘지)을 거쳐 5·18 민주 광장, 전일빌딩까지 둘러보는 일정입니다. 좋은벗들 사무국장과 평화재단 역사연구개발팀장을 겸하고 있는 이승용 님이 해설을 맡았습니다.

집결 장소인 망월 묘지공원(구묘역) 주차장에 일찍 왔습니다. 두리번거리니 얼굴이 낯설지만, 정토회원인듯한 사람들이 벤치에 모여 있었습니다.

누군가 큰 소리로 제게 물었습니다.

"정토회?!!"

전주지회 도반들이었습니다. 제게도 간식을 나눠주었습니다. 배를 든든히 채웠습니다. 잇따라 여러 지역에서 도반들이 도착했습니다. 멀리 서울에서 온 역사 기행 안내자 이승용 님도 있었습니다.

▲ 해설자 이승용 님

환영 인사를 나누는 동안, 시작에 앞서 도반들에게 간단한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 지부실천활동 담당 양지원 님

“지부 실천활동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가깝게 있으면서도 한 번도 못 와봤거든요. 답사하면서 더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유익하고 감사한 시간이었어요. 이승용 님이 오셨기 때문에 더 많은 정보를 얻을 거라 기대합니다. 광주가 민주화의 시작이자 꽃이잖아요. 오늘 좀 기쁜 날입니다. 활동하는 데 한 걸음 나아가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

▲ 전주지회 김순자 님

“5·18 당시에 고3이었고 현장에 있었어요. 그때는 내막을 전혀 몰랐는데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이 알게 됐죠. 좀 더 세세하게 알고 싶어요. 내가 성장했던 곳이고 우리 고장이잖아요. 정말 생생해요. 자고 있으면 대포 소리, 총소리가 많이 났고 불빛이 밖으로 안 나가게 이불로 가리고 잤어요. 그런 아픈 기억 때문에 더 사실대로 알고 싶어요. 그때 생각하면 감사하고 무거운 마음이지만, 오늘은 봄 소풍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동참하고 싶어요.”

10시가 되자 모두 주차장 그늘 벤치에 앉거니, 서거니 둥그렇게 모였습니다. 행사 총괄을 맡은 박윤정 님이 행사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 행사 총괄 박윤정 님

“5·18 민주항쟁이 있었던 지역이 광주잖아요. 그런데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가 5·18 민주화 운동을 정확하게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까지 지부 차원에서 이런 역사 기행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 5·18 민주항쟁의 역사적 배경, 전개 과정을 좀 더 명확하게 알고 가자는 생각으로 기획했습니다.”

이어 이승용 님의 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5·18의 개요를 전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광주 시민 항쟁 또는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데,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나서 주로 '5·18'이라고 알려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권력의 공백기가 생겼고 신군부 세력이 집권했습니다. 대학생들의 저항이 있었습니다.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대대적으로 전국적인 총궐기를 했습니다.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전국 각지에서 학생 조직 대표들을 잡아들이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전라도는 검거량이 적었고, 광주에서 신군부에 대항하는 집회가 조직됐습니다. 결과적으로 신군부는 광주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 1980년 5월 14일 민족민주화성회(나경택_5·18 인류의 유산, 오월의 기록 2차 개정판 16쪽)

▲ 전남대학교 교수 100여 명이 합세한 민족민주화성회(나경택_5·18 인류의 유산, 오월의 기록 2차 개정판 42쪽)

"그즈음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 모인 시민들과 대학생들은 밤새 횃불을 켜고 평화 집회를 했습니다. '민족 민주화를 위한 성스러운 집회'란 뜻으로 ‘민족 민주화 성회’라고 부릅니다. 신군부가 계엄령을 내리면 흩어지지 말고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모여서 다시 저항하자고 약속하고 해산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17일 계엄령이 떨어지고, 5월 18일 ‘민족 민주화 성회’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전남대에 모이면서 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5·18입니다."

"5월 18일, 처음으로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남대학교 정문, 광주역, 전남도청, 다시 금남로, 충장로로 장소를 옮기며 집회를 이어갔고, 전투 경찰과 충돌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하고 연행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가 발포하자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면서 5월 20일, 드디어 10만 명 가량 도청 앞에 모여서 본격적으로 저항하게 됩니다."

▲ 1980년 5월 20일 차량 가두시위 (이창성_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도록 117쪽)

"이때 많은 버스와 택시 운전사들이 광주 시내를 다니며 공수부대의 만행을 목격했고, 분노했습니다. 버스와 택시 200여 대가 무등경기장에 모여 금남로를 따라 도청 앞으로 행진했습니다. 이런 시민들의 위력 앞에 공수부대는 굉장한 위협을 느꼈고 점차 격앙됐습니다."

▲ 1980년 5월 20일 차량 가두시위 (나경택_5·18 인류의 유산, 오월의 기록 2차 개정판 70쪽)

"그러다가 5월 21일, 애국가를 부르는 광주 시민들에게 공수부대가 조준 사격을 가했습니다. 많은 시민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병원마다 이미 환자들이 넘쳐나는데 수십 명의 사망자까지 생기는 엄청난 무력 충돌이 벌어진 겁니다. 시민들은 더 이상 이것이 단순한 우발 충돌이 아니라, 아무리 많은 인명피해를 내더라도 광주를 진압하고 권력을 잡고야 말겠다는 신군부의 의도를 파악했습니다. ‘더 이상 평화적인 저항은 의미가 없다. 우리도 무장하자’라는 여론이 대대적으로 확산됩니다."

▲ 1980년 5월 21일 부처님 오신 날,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대치 중인 시민들(나경택_518 인류의 유산, 오월의 기록 2차 개정판 81쪽)

"결국 시민군들이 무장하고 대치 상태가 되니, 공수부대는 광주를 아예 봉쇄해 버립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도록 광주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작전으로, 이 때 까지 공수부대의 작전을 ‘화려한 휴가’라고 불렀습니다."

▲ 진압 작전에 동원된 계엄군의 장갑차(국가기록원_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도록 227쪽)

"공수부대는 도청에 있는 지도부 진압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이것을 ‘상무충정작전’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광주는 22일부터 26일까지 평화적으로 보냈습니다. 더 이상 충돌도 크게 없었고, 굉장히 안정적이고, 질서가 유지되었습니다. 군인, 경찰을 제외한 모든 공무원이 시민군에게 협조했으며, 광주는 어떠한 약탈도, 범죄도 없는 해방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 계엄군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시민(이창성_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도록 153쪽)

"시민군 지도부는 군부와 몇 차례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시민군은 ‘신군부 세력의 집권 자체가 부당하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시민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신체적 피해와 재산상 피해 전부를 보상하라. 책임자, 발포 명령자들도 처벌하고 사과해라. 명분 없는 계엄령은 해제하라. 어떠한 이유로도 보복하지 않기로 약속해라. 그러면 총을 반납하고 평화적으로 광주를 운영하는 데 협조하겠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반면 신군부 측에서는 '무조건' 총기를 반납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라고 한사코 요구했습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

▲ 도청 앞 분수대의 계엄군 장갑차(나경택_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도록 188쪽)

"마침내 5월 27일, 공수부대가 도청으로 밀고 들어온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이 말했습니다. '학생과 여성 여러분은 살아나가서 역사의 증인이 되십시오!’ 마지막 날 도청에 남은 사수대는 150명에서 200명 정도였습니다."

▲ 계엄군에게 사망한 아버지의 영정을 든 다섯 살 아이, '5월의 꼬마 상주' (독일 QUICK, 26호)

"5월 27일 새벽 4시, 도청은 전기가 끊기고 방송도 중단됐습니다. 모든 건물이 깜깜해지자, 공수부대가 밀고 들어와 1시간 가량 교전이 이어졌습니다. 저항한 시민군들이 전부 다 죽거나 산 채로 연행되면서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5월 18일부터 열흘 정도,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이 ‘광주 5·18 민주화 운동’입니다."

▲ 1980년 5월 29일, 희생자를 망월동 묘역에 안장 중인 유족들(나경택_5·18 인류의 유산, 오월의 기록 2차 개정판 85쪽)

"공식적으로 사망한 민간인은 166명, 사망이 확실하지만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실종자가 73명 정도 됩니다. 전체 기간에 잡혀가서 구타당하고 고문당하고 다친 사람까지 합하면 5,807명에 달합니다. 이름과 행적이 밝혀진 분들은 이렇게 공식 유공자로 국립묘지에 모시고 있습니다. 지금도 증언이 나오고 있고, 가매장이 됐거나 몰래 묻었던 사례가 있어서 계속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망월동 묘지의 유족들(나경택_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도록 189쪽)

이승용 님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조용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때의 시간으로 끌려 들어 갔습니다. 여러 사건의 줄기가 있지만, 특히 시민들이 무장하고 전면에 나선 상황을 들었을 때 절로 소름이 돋았습니다.

▲ 망월 묘지공원 유영봉안소 앞 기념 동상

잠시 후 바로 옆 '유영봉안소'로 이동했습니다. '그림자가 남았다'라는 뜻입니다. 이곳에는 1980년 이후 돌아가신 민족민주열사들의 영정을 모셨습니다.

"유영봉안소에는 민주화 활동가들의 위패와 초상화를 모셨습니다. 대부분 광주 민주화 운동을 알리기 위해서, 또 진실 규명을 요구하면서 단식 투쟁하거나 투신하거나 저항하면서 돌아가신 분들입니다. 거의 대학생들이거나 노동자들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에도 독재가 완전히 끝나고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까지 활동했던 많은 민주화 운동 활동가들이 여기에 모셔져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분으로는 이한열 열사를 들 수 있습니다."

망월동 공동묘지는 5·18 이전에 광주의 공식 공원묘지였습니다. 갑작스럽게 많은 사람이 죽으니, 공동묘지에 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했던 분들은 무덤이 두 개입니다. 처음에는 여기(구묘역, 망월 묘지공원)에 묻혔는데,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국가유공자가 되면서, 지금은 옆에 있는 신묘역(5·18 민주묘지)으로 이장되었습니다. 다만 처음 묻혀 있던 곳도 전부 그대로 남겨놓았으니, 그곳으로 한 번 가보겠습니다."

우리는 안내를 따라 제3묘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은 5·18 사적지 제24호로 지정된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입니다. 호남지역의 민족민주열사, 희생자가 안장되어 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이 공적을 인정받으면서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현장 곳곳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광주 시내를 다니다 보면 이런 돌비석을 군데군데 만날 수 있습니다. 다섯 갈래로 쭉쭉 뻗은 선은 사람이 두 팔 두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자유를 상징하고, 횃불은 민주주의를 상징합니다."

▲ 5·18 민중항쟁 사적비

"이분들의 희생으로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많이 진전될 수 있었습니다. 광주항쟁 이후로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멈췄습니다. 그것이 이 민주화 운동의 가장 큰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맑은 하늘, 봄이지만 초여름 열기가 스며드는 날씨, 사방에 송화 가루가 날렸습니다. 무덤 앞 비석과 흑백 사진, 수많은 사연들, 머릿속이 이야기로 가득 찼습니다. 사진 속 얼굴들은 "우리는 이렇게 살았노라"라고 외치며 불쑥불쑥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참가자들은 묘역에 묻힌 이들이 평안히 잠들기를 다 같이 기원했습니다.

11시쯤, 우리는 돌탑 무더기가 늘어선 작은 추모비 앞에 멈춰 섰습니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영화 ‘택시 운전사’에 나오는 주인공 중 한 명입니다.

"여기는 독일 기자였던 위르겐 힌츠페터라는 분의 무덤입니다. ‘택시 운전사’라는 영화를 보셨을 겁니다. 이분은 베트남 전쟁에도 참여한 기자인데, 봉쇄된 광주를 취재하기 위해 택시 운전사 한 사람을 섭외해서 사선을 넘었습니다. 그가 여기 상황을 외신에 알리면서 전 세계적으로 신군부를 지탄하는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생전에 죽으면 광주에 묻어달라고 유언도 남겼지만, 그러지 못하고 독일에 묻혔습니다. 대신 그 분의 부인이 고인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광주로 보내와서 이곳에 묻었습니다."

구묘역 참배를 마치고 5·18 민주묘지(신묘역)로 이동했습니다. 봄 꽃으로 화사한 길을 걸어 5·18 추모관에 다다랐습니다.

이날 추모관 방문객이 많지 않아 우리는 여유롭게 영상을 관람했습니다. 장면이 눈에 익은 걸 보니 TV에서 한번은 봤던 순간들입니다.

지직거리는 잡신호가 섞인 컬러화면이 시간의 경과를 보여줍니다. 이유 없이 끌려가는 시민들을 보니 답답함이 목을 치고 올라왔습니다.

▲ 1980년 5월 27일 연행된 아이(KBS 다큐 인사이트 '오월의 기록' 중)

아찔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산맥처럼 당당하게 살아남은 광주시민에게 감사했습니다.

영상 관람 후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버지의 영정을 품은 아이, 5월 22일에 멈춘 태엽 시계, 관이 부족해 시신을 둘둘 말았던 비닐, 그리고 피 묻은 태극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 5·18 추모관 1층

"주남 마을은 화순으로 가는 길인데, 공수부대가 희생자들을 암매장해서 최근에도 유해가 많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총 열흘 동안 2만 명이 넘는 공수부대가 기차를 타고 광주로 내려왔습니다. 주남 마을에서 송정역 쪽으로 가는 이 일대에서 공수부대끼리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민가를 향해 분풀이로 총을 쏴, 당시 10살 남짓이었던 무고한 아이들이 죽었습니다."

▲ 1980년 5월 24일, 공수부대 이동 중 무차별 민간인 학살 장소(5·18 인류의 유산, 오월의 기록 2차 개정판 119쪽에서 재인용-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창비, 2017, 331쪽-)

 

추모관을 떠나 참배 광장으로 갔습니다. 하늘을 향해 당당히 선 추모탑 뒤 묘역은, 구묘역에서 이장된 분들이 잠들어 계신 곳입니다. 참배객 모두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묵념했습니다.

▲ 5·18 민주항쟁 추모탑 전경

"민주화 항쟁 기간에 20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미성년자가 55명으로, 약 25%입니다. 영상에 보면 초등학생들도 부모 따라서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저 사람들을 '무슨 폭도다, 반체제 세력이다'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군인들의 자국민을 향한 총질에 분노해서 궐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무장항쟁 군상

여기에 묻힌 분들은 전부 유공자이기 때문에 무덤과 위패를 같이 모시고 있습니다. 공적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신묘역 오른쪽에 마련된 유영봉안소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봉사자 도반이 태극기를 하나씩 손에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유영봉안소를 참배했습니다.

 

 

신 묘역 참배를 모두 마치고 참배 광장에서 줄을 지어 단체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했습니다. 선창에 따라 태극기를 흔들며, 준비한 구호를 힘차게 외쳤습니다.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자!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자!
613 만인, 대법회!
죽림정사에서, 만나요!”

태양 빛이 강렬한 정오의 한복판, 점심 공양에 나섭니다. 도반들은 정자나 적당한 나무 그늘을 찾아 자리를 잡고 소박한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밥만 싸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럿이 먹을 만큼 풍족한 반찬을 싸 온 도반도 있습니다. 맛을 보라며 찬을 나눠 주는 이의 얼굴이 환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반찬을 맛보며 봄 기운을 만끽했습니다. 가지마다 연둣빛 작은 잎을 드리운 단풍 나무가 그늘이 됩니다.

당시 가마솥을 준비해 시민군에게 밥을 해준 어머니들의 인심이 이러했으려나! 이번 여행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후회가 남았을 것입니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5·18 민주 광장(구 전남도청)으로 향했습니다. 마침, 도청은 복원 공사 중이었고, 5·18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분수대가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냈습니다.

 

"저희가 와 있는 이곳은 전남도청 앞 분수대입니다. 분수대는 광주 시민들이 칠흑 같은 어둠을 지나서 새벽이 밝아오도록 한다는 의미로, 밤새 횃불을 켜놓고 민족 민주화 성회를 했던 장소이기 때문에 특별합니다. 이 앞에서 공수부대와 광주 시민들이 대치했습니다. 21일 오후 1시에 도청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시민들은 신호등이 있는 저쪽에 쭉 줄을 서 있었습니다. 애국가가 끝나자마자 그쪽을 향해 발포하면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 현재의 금남로

민주광장을 가로질러, 길 건너에 있는 전일빌딩 245 건물로 향했습니다.

먼저 온 여행객이 많아, 우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올랐습니다. 난간에서 시선을 아래로 향하면 복원 공사 중인 구 도청 건물, 상무관, 분수대, 시계탑, 금남로 전경이 한눈에 보입니다.

"전일빌딩은 10층짜리 건물인데 9층, 10층을 전시관으로 쓰고 있습니다. 지금은 안 높아 보이지만 80년에는 전남 일보 신문사였습니다. 제일 높다 보니 시민군도 계엄군도 항상 이 건물을 먼저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위에 올라가면 멀리서 계엄군들이 들어오는 게 잘 보였습니다. 그래서 계엄군은 5월27일, 헬기를 이용해 건물에 있는 시민군을 향해 기관총 사격을 가했습니다. 245발의 총탄 자국이 발견되어서 '전일빌딩 245'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 1980년 5월 27일, 전남일보 편집국 유리창의 총탄 자국(촬영자 미상_5·18 인류의 유산, 오월의 기록 2차 개정판 141쪽)

▲ 전일빌딩 245의 10층 헬기 모형

총탄 자국을 보기 위해 10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헬기에서 총을 쏘다 보니, 천장을 뚫거나 바닥을 할퀸 총탄 자국이 선명합니다.

"먼저 총탄 자국을 볼까요? 천장에 오목한 흔적이 총탄 자국입니다. 바닥에 있는 게 다 총탄 자국이고, 기둥 안쪽에도 많이 박혀 있습니다. 위에서 이렇게 쏘았다는 겁니다. 각도를 보면 전부 하늘에서 총알이 날아온 걸 알 수 있습니다."

 

 

"전일빌딩이 당시에는 전남일보사 건물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때 광주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기사 초안을 쓰면 정부 기관의 검토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빨간 줄로 쫙쫙 그어버리고는 고쳐서 발행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기자들이 진실을 알리기 어려웠습니다."

▲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의 집단 사직서(오마이포토 뉴스사진, 2021.11.24)

전시장 곳곳에서 목격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사진, 관련 문서 등 방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시장 벽 한구석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문장에, 지나던 발걸음을 잠시 멈춰 세웠습니다.

모두 1층에 모였습니다.  이제 역사 기행을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해설자 이승용 님의 마무리 발언이 이어집니다.

"광주는 시민들의 용기로 많은 희생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아시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5·18 이후 더 이상 군부 쿠데타가 없었고, 완전한 직선제를 얻어냈습니다. 민주주의는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아직 완전한 보상, 완전한 사과, 완전한 진상 규명이 안 되지 않았느냐?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넓고 길게 본다면 모든 유족들이 만족할 만큼의 사과, 배상, 명예 회복은 현실적으로 도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무리 사과하고 보상한다고 잃어버린 가족이 돌아오진 않잖습니까? 오히려 광주 시민들은 광주를 아픈 상처를 가진 도시가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문화적인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아픈 과거를 잊지 않지만,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선도하는 도시'로서, 훨씬 더 발전적인 광주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끝으로 둥글게 둘러서서 소감을 나눴습니다. 여기에 그 일부를 실으며 오늘의 여정을 다합니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뿌리를 찾다 보면, 그 과거의 흔적들을 통해서 알 수 있어요.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지, 아이들에게 무엇을 알려줘야 하는지를요. 이것은 마음공부를 하거나 자신을 아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제가 23살쯤에 5·18을 겪었어요. 5·18 묘역하고 집이 아주 가까워서 약간의 의무감에 참석했습니다. 5월만 되면 광주시민들의 감정이 격해지고 숨이 가빠지고 분노가 치미는 모습이 매년 되풀이됩니다. 이번 역사기행에서 5·18이 어떻게 비칠까 무척 궁금했는데, '또 다른 5·18'을 듣는 자리였습니다. 해설자님과 참여한 도반들의 나누기에서, '매우 차분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느꼈습니다. 또 기억과 기록이라는 거,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석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지더라고요. 젊은 분들, 어린아이들도 많았어요. 계엄군이든 시민군이든 가리지 않고 주먹밥을 줬다는데 나는 어떤가 돌아봤습니다. '그런 따뜻한 마음이 지금 우리가 잘 사는 데 기초가 되지 않았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묻히신 묘역에 핀 꽃들이 화려해서 좋았어요.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 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한강,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_눈 덮인 램프 중에서

글_여수연(광주전라지부 서광주지회)
사진_최종열(서광주지회), 양지원(서광주지회), 황은정(경전대학생), 이강숙(전주지회), 전옥진(전주지회), 이승준(전주지회)
편집_이승준(광주전라지부 전주지회)

*인용한 모든 자료는 온라인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 공공저작물로 공개된 간행물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사망자수는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보고서(직가-2) 기준, 사상자수는 같은 위원회 조사보고서(직가-8) 및 5·18 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심의위원회가 7차까지 보상한 결과 기준입니다.

 

 

출처 : 산맥처럼 당당한 기억_5·18 광주역사기행 - 정토행자의 실천 (jungto.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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